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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제주목사 이재호에 대해서는, “전 목사 이상규만큼 탐욕스러운 자”라고 악평하고,
“목사는 어리석고, 진정서에 좋은 대답만 해줄 뿐이고, 불행한 신자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명령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그토록 나
쁜 짓을 한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때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목사를 야비한 자라고 혹평하
고 있다. 38)
39)
서울서 파견된 검사시보 황진국 에 대해서는, 서울로부터 교민을 살해한 자들을 처벌하
라는 명령을 받고도 무시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회 측에서는 그를 완고하고 신임 없는 인물
40)
로 평가하였다. 그는 1902년 6월경 잠시 서울로 갔다가 7월에 다시 제주로 돌아오게 되
었는데, 당시 교회 측은 그가 제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라크루 신부는 주교에게 그
의 귀환을 막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41)
1902년 이후에도 이러한 교회와 향촌사회의 갈등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였다. 예컨대,
1902년 12월에는 민란 주동자 김남혁이 석방되고 귀향한 뒤 자신에게 백 명의 무리만 있
으면 교민들을 모두 학살하겠다고 공공연히 발언하였다. 1903년 초 정의군 지역에서는
42)
천주교의 폐지를 요구하는 等狀이 준비되기도 하였고, 하논성당이 자리잡은 호근리에서는
43)
許座首라는 자가 반교회적인 비밀결사를 설립하고 더 나아가 마을을 둘로 해체할 것을 요
구하기도 하였다. 정의군의 예비신자 김희주는 두 형제를 살해한 자기 마을의 몇 사람에
44)
게 복수심을 품고 두 형제의 아들들을 부양하라고 격렬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45)
이런 와중에 서귀포 하논성당에서는 소위 ‘양시중 사건’(1902)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하
논에 사는 교민 박재순이 예촌에 사는 별감 양시중을 때린 데 대하여 일본인과 결탁한 송
시백과 일본인들이 무기를 들고 하논마을에 돌입하여 난리를 일으켰던 데서 비롯되었다.
즉, 1902년 6월 10일 하논본당 교민 박재순이 술을 먹고 길을 가다가 양시중이 춘궁기에
음주하였다는 이유로 욕설을 하자, 박재순이 대들면서 서로 싸움이 붙었다. 이 과정에서 양
시중의 탕건이 부서졌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타케 신부는 박재순에게 엄한 벌을 내리고,
양시중에게 탕건 값 4냥을 변상하였다. 그런데 돌연 6월 13일에는 서귀동의 송시백의 집에
체류하던 일본인 11명이 총포 2자루와 군도 3개, 창 4개, 깃발 2개를 가지고 고동을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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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논마을에 사는 교민들을 공격하였다.
36) 위와 같음.
37)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14일자 서한.
38)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28일자 서한.
39) 1901년 8월 19일 제주사건을 심사하기 위하여 제주목 검사시보로 임명되었다(官報 1901년 8월
23일).
40)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2년 2월 19일자 서한.
41) 라크루 신부는 “그는 신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조사를 했고,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
받은 신자들을 옳다고 보지 않았던 자이다.”라고 하여 제주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뮈텔문서」, 라크
루신부의 1902년 6월 30일자 서한).
42)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3년 3월 4일자 서한.
43)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3년 3월 12일자 서한.
44)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3년 3월 4일자 서한. 타케 신부는 이 단체를 제주교안 직전 설립된 대정
군의 상무사와 전적으로 같은 반교회적 조직이라고 보았으며, 김남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
다. 마을을 둘로 나누겠다는 것은 교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하논 마을을 호근리에서 떼어내겠다
는 의도로 보인다.
45)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3년 6월 11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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