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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새로이 이전한 홍로성당에는 예비신자들이 서서히 입교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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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1903년 홍로에서만 34명의 새로운 교민을 확보하게
되었고, 특히 제주도 동남부 지역의 교세도 확대시켜 갔다. 이 과정에서 떼미공소가 신설되
었다. 1904년 2월 29일 떼미공소를 방문하여 6명의 교민에 대한 영세를 준 사실이 세례대
장을 통하여 확인된다. 동남부 지역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예비신자 120명을 확보하였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교안의 피해를 크게 입었던 대정군 지역에서도 예비신자
30명을 확보하여 교세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대정군 지역의 선교는 상당히 어려운 실
정이었다. 64)
65)
1904년 이후 홍로본당의 교세 확장은 두드러졌다. 1904년의 영세자는 43명이고,
1905년의 영세자는 67명이었음이 세례대장에서 확인된다. 1910년 초 당시 신자 총수는
195명에 달하여 교안 직전의 교세를 상회하게 되었다. 1910년 부활절 당시 세례대장에 기
재된 영세자 300명에 대한 현황을 통하여 당시 교세를 가늠하여 볼 수 있다.
< 1910년 당시 교세 현황표 >
신자 현황 세례대장 유고 신자
잔여신자
관할 신부별 영세자 기재 신자 사망 이사 냉담 살해 행불
김원영 신부 영세자 123명 13 15 16 48 9 22명
무세 신부 영세자 10명 1 3 1 5명
타케 신부 영세자 167명 18 25 23 101명
계 300명 32 43 40 48 9 128명
(출전 - 교세통계표 타케 신부(1909∼1910). * 냉담 : 정기적인 교회 성사를 치르지 않는 신자, * 살해 :
교안 때 피살된 신자, * 행불 : 교안 때 남편이 죽고 비신자와 결혼한 부인과 그 자식들, * 신자 총수
195명에는 이사 온 신자 포함 )
당시 교회의 복구와 교세의 확장을 위하여 두 신부는 우선적으로 교회가 순수한 신앙공
동체로 정착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신부들은 제주교안의 원인을 제공했던 藉托 교민들의
교회 출입을 특히 경계하였고, 교민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자들은 직접 징벌을
66)
가함으로써 교회를 정화시키는 데 적극 노력하였다. 또한 안정된 선교를 위하여 본당의
정착과 건물의 신축・확장, 공소의 증설에 주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교회는 전교의 한 방법
으로서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교육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 결과
67)
라크루 신부는 1902∼1903년 이전에 소규모의 여학당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62) 위와 같음.
63)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4년 1월 4일자 서한.
64) 대정군은 교안의 진원지로서, 교안 이후 상당 기간 교민들에 대한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아 교세 회
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2년 9월 4일자 서한 ; 콩트 랑뒤 1902
년도 보고).
65) 1903년까지 타케 신부는 교세 확장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3년 3월
4일자 서한). 그러나 1904년부터 예비신자들이 늘어나고 개종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고 파악하였다(「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4년 1월 4일자 서한).
66)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2년 9월 4일자 서한 ; 1903년 3월 4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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