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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랭이・광양동에 교민이 집중되어 있었고, 금악리와 연평리(소섬, 우도) 같은 산촌과 섬 지
역에 교민이 분산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민 분포는 제주교안 이후인 1910년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까닭은 교안을 전후한 시기 내내 라크루 신부가
이 구역을 관할하였던 때문이며, 남부지역에 비하여 교안의 피해를 덜 받았던 데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섬의 신자가 많아진 이유는 교안 당시 학살을 피해 일부 교민들이
이곳에 은신하였다가 정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71)
2) 가족 관계
하논본당 세례대장(1899. 6∼1901. 3)에 나타난 교안 직전까지의 신자는 모두 124명으로
서, 그들은 상당수가 직계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교안 이후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세례대장(1901. 11∼1910. 12)에서 보듯이, 교민 가족 구성원이 같은 날 함께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천주교민의 상당수는 직계가족과 친
족을 중심으로 하여 입교하였다. 결국 당시 천주교회는 친족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연령별 분포
세례대장에 보이는 하논(홍로)본당 신자의 연령 분포를 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연령별 신자 수 >
연 령 0-9 10-19 20-29 30-39 40-49 50-59 60-69 70-79 미상 계
교안 이전 22 18 28 14 17 11 8 5 1 124
수
교안 이후 73 18 33 28 20 11 6 1 190
교안 이전 전체 신자 가운데 20대에서 40대에 걸치는 청장년층이 59명(47.6%)으로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이러한 청장년층 남성 위주의 교민 구성은 당시 천주교회가 사회세력
화되어 갔던 실정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교안 이후 청장년층은 81명(42.6%)으로
서, 이전보다 비중이 약해졌다. 그러나 30대 신자의 비중은 더욱 커지고 있고, 유아기인
10세 미만의 영세자가 73명(38.4%)이나 차지하는 것으로 보건대, 결혼과 출산을 통한 입교
72)
가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령 구성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직계가족 중심 교회
의 성격을 역력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이는 이전의 교회가 사회세력의 성격을 강하
게 띠었던 데에서 벗어나 본연의 종교집단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71) 1904년 당시 소섬의 영세자는 20명이며, 예비신자는 61명이었다(「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4년
5월 19자 1904년 연말 보고).
72) 특히 갓 태어난 영아의 유아세례자가 세례대장에 많이 나타나 있음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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