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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18일 제주에 유배와 있던 박영효 등의 도움을 받아 신성여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신성여학교는 라크루 신부의 노력에 의해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함
으로써, 1910년대 이후 제주지역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8)
1910년 한일병합으로 한국 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반면 이듬해인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구교구 설정으로 제주본당과 홍로본당은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제주지역의 총 신자
수는 400여 명이었고, 예비신자 수는 1,500여 명이었다. 이러한 제주지역 교회의 상황은
대구교구 설정 직전인 1911년 5월,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제주도에는 420명의 신자(제주본당 213명, 홍로본당 197명)가 있는데, 두 명의 선교사
(라크루 신부와 타케 신부)가 관할하고 있습니다. 도로 사정이 어렵지 않거나, 공소 간의 거
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이 섬의 상황이 그들에게 많은 여가를 줄 수도 있겠지만,
조그마한 여행도 탐험 원정과 같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제주도 신자들은 1907년 뮈텔 주교의 제주도 방문에 이어 1911년 10월 말 안세화 플로
리아노 대구교구 주교의 제주도 사목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 주교는 이때의 제주도
순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증기선을 타고 14시간 걸려 도착한 제주도는 10년 동안이나 구신부(라크루 신부)와 엄신
부(타케 신부)에게 굳건한 덕성과 인내심을 갖게 합니다. 그들은 대학살이 있었던 1901년부
터 주의 은총이 재난으로 입은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교안
이후 몇몇 여인들과 어린이들만이 그곳에, 현재는 교리도 잘 배우고 수계도 잘하는 교우
수가 400명이나 됩니다. 두 신부는 매우 진지해 보이는 1,500명의 예비신자들을 등록시키
게 되어 기뻤습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생기면서 제주도의 두 본당은 대구교구에 소속되었고, 타케 신부도
대구교구에 소속됐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타케 신부는 전쟁 소집 명
령을 받고 제주를 떠나 1914년 8월 15일에 대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소
집 연기를 받은 데 이어서 이듬해 3월에는 징집 면제를 받았다. 1915년 6월 7일 타케 신
부는 목포 산정동 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홍로본당에는 영천 용평본당에서 사목하던
김승연(아우구스티노) 신부가 4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5월 27일 안세화 주교는
다시 한 번 인사이동을 했는데, 홍로본당의 김승연 신부는 전주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러
나 이때 홍로본당에는 주임 신부가 임명되지 않음으로써 사제 공백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
었다.
대구교구장 안주교는 당시 상황을 안타깝게 인식하고 있었다.
“16년 전부터 두 선교사에 의해 복음화되어 온 제주도는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수녀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번창했던 학교(신성여학교)는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목포(산정동본당)의
67)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3년 10월 2일자 서한.
68) 신성여학교의 설립과 운영・성장과정, 제주지역에 미친 영향 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양진건, 「제주도 최초 근대여학교, 신성여학교 연구」, 탐라문화 18,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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