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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별 분포
교안 이전 하논본당 신자 가운데 남자는 87명, 여자는 37명으로 파악되어, 남자 신자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남자 신자 가운데 20대에서 40대에 걸치는 청장년층은 42명으
로서 같은 연령대의 여자 신자가 17명이었던 데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남성
위주의 교민 구성은, 당시 천주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에 민감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안 이후에 와서는 남자 96명, 여자 94명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청장년층의 경우, 남자 40명, 여자 41명으로 오히려 여자 신자가 더욱 많
다. 이러한 성별 분포의 변화는 연령별 분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 천주교회가 교안 이
후 사회세력이 아닌 신앙공동체로서의 종교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7. 맺음말
타케 신부는 제주도 하논본당에 부임하기 전에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부산, 진주, 마
산 등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는 진주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할 당시 비
라실 공소의 전교회장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향촌사회 내에서 교회와 관・민의 갈등을 미연
에 방지하기 위한 아래의 방침을 전달한 바 있었다.
첫째, 성당은 거룩한 집이니 그 안에 사람을 가두거나 잡아들이지 못한다.
둘째, 신자들이 모여 신부의 글〔牌旨〕을 사사롭게 주고받지 못한다.
셋째, 성당 안에서 수작을 부려 세속의 일을 조사하거나 논의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넷째, 신부의 지시가 없는 일을 비신자들 앞에서 있는 것처럼 하지 못한다.
다섯째, 관청 송사에 관하여 정당한 까닭 없이 천주교 신자와 천주교에 관련되는 일이라
고 주장하지 못한다.
여섯째, 위에 보인 규식을 회장이 살펴 어기지 못하게 하되,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신
부에게 낱낱이 알려야 한다.
일곱째, 이 조목이 내려진 뒤 어기는 자를 회장이 알고도 신부에게 알리지 않으면, 그 회
장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73)
타케 신부 자신도 불량 교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저의 교우들은 주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
다. 그런 사람들은 교우들이 아닙니다. 저의 진짜 교우들은 착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
다. 많은 수상한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우로 자처했던 외교인들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다.” 74)
73) 동래법관 양대인(타케 신부)이 비라실 두 회장에 주는 유시 서한(「뮈텔문서」 1899-124).
74) 진주 타케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뮈텔문서」 1899-245, 1899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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