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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본당 관할 제주군 관내 지역별 교민 수(1909∼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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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교세통계표 라크루 신부(1909∼1910). 괄호 밖은 신자 수, 안은 예비신자 수)
첫째, 제주교안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세는 하논본당 관할 구역인 제주도 남부지역이 제주
본당 관할 구역인 북부지역보다 강하였다. 그러나 교안 직후인 1902년 초 교세는 제주 북
부지역의 신자 수가 절반 정도 감소한 데 반하여 남부지역은 삼분의 일 정도로 격감하였
다. 특히 남부지역에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있던 예비신자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변화는 교안의 영향이 특히 남부지역에 강하게 미쳐졌음을 보여준다. 1902년 후반
으로 접어들면서 북부지역은 정체되고 남부지역은 회복되는 추세로 바뀌었다. 이는 남부지
역에 새로이 파견된 타케 신부가 하논에서 홍로로 본당을 옮기고 본격적인 전교 활동에 나
서면서 교안의 영향을 최소화시킨 결과로 보인다. 1904년 초가 되면 교세는 교안 직전 수
준으로 완전히 회복되고, 양 지역 모두 계속 점진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제주교안이 발생하기 전의 지역별 교민 수가 파악되는 하논본당 관할 구역만 대상
으로 하였을 때, 교민들은 대체로 본당이 위치한 하논과 홍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양근・
벵듸친밭・색다리・녹화지 등 산간 벽지의 화전촌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한편 邑治 지역인 대정과 성읍에는 교민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교안 이후에 다소 달라지고 있다. 우선 본당을 중심으로 교민들이 집중되
는 추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1902년 6월 이전 본당이 있던 하논과 그 이후 본당소재
지인 홍로에 전체 신자의 거의 절반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하논의 경우 교안의 피해를 심
하게 받았다. 70)
한편 교안 직전 교세가 강하였던 양근・색다리 등의 지역에는 거의 교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본당소재지로의 교민 집중 현상은 본당과 떨어진 공소들이 교안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 배척받은 결과로서, 교회의 보호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역 중심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903년 이후 떼미・예촌・울에 등 동남부지역에 새로이 공소가
설치됨으로써 포교 범위가 서서히 본당에서 동쪽으로 확장되어 갔다. 반면 서남부 대정군
지역은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대정은 교안의 진원지로서, 교안 과정에서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에도 교세의 회복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북부지역인 제주군의 경우에는 1901년 당시 제주본당이 있던 읍내, 본당과 가까운
70) “하논은 원래 신부와 교인들만이 사는 곳”, “본래 하논은 작년 난리를 치른 참상이 다른 곳에 비해
더욱 심하여 남자 10세 이상은 도륙당해 남아 있지 않고 여인들이 다소 있을 뿐. 지금 일부 남자가
남아 있는 것은 난리가 지나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부쳐살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더불어 살면서 품을
파는 사람들”, “1902년 현재 열 집에 불과한 마을”이라는 표현이 당시 기록에서 확인된다(「뮈텔문서
」(1902-118), 제주교우의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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