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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성당을 거점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하던 김원영 신부는 신축교안이 일어나기 직전인
1901년 4월 피정 차 상경하였다가 다시 하논성당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하논성당은 신축
교안의 과정에서 파괴되고 수백 명의 신자들이 피살되었다. 김원영 신부는 새로운 부임지
목포에서 사태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하논성당 신자 3명을 만나서 피해 상황을 들었는데,
본당과 사제관이 파괴되고 복사 박고스마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으며, 하논마을의 많은 남자
들이 살해되었고, 다른 마을에서도 민군들이 교민들 345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57)
2) 타케 신부의 홍로성당 이전
제3대 주임신부로 1902년 4월 하논성당에 부임한 타케 신부는 “이곳 하논의 사정은 그
리 좋지 않습니다. 마을에는 거의 과부들뿐인데, 젊고 늙은 과부 열한두 명이 제 집을 포함
해 열한 채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당시의 어려운 실정을 드러내었다. 때문에
타케 신부는 이러한 하논성당의 열악한 실정을 인식하고 새로운 성당을 구입하기 위해 노
력하였다.
“하논의 집으로 말하자면 허물어 버리기에 딱 좋을 만하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
닙니다. 제가 와서 보니 가장 좋은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허술한 집 여기저기에 비가 새고 있습니다. 바닥은 땅과 같은 높이여서 위아래로 습기가
차 있습니다. 문 앞에 있는 지붕은 제 어깨까지 내려옵니다. 마루가 없기 때문에, 비가 오
는 때에는 바람을 쐴 수도 없습니다. 반면 방안에서는 여기저기 벽 틈을 통해 바람이 들어
옵니다. 더구나 그곳으로 뱀과 다른 벌레들이 지나다닙니다. 집은 논에서 10m 정도 되는
곳에 있으므로 이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말라리아 열병 때문에 제게 키니네를 달라고 합니
다. 결국 이곳은 완전히 고립된 마을로 남자들이 없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좋지 않
습니다.” 58)
결국 타케 신부는 1902년 7월 본당을 하논에서 홍로로 옮겼다. 타케 신부는 부임 직후
하논본당의 열악한 여건을 간파하고, 다른 본당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1902년 6∼7월에
59)
하논에서 5리 떨어진 홍로에 건축 중인 집을 한 채 사서 본당을 이전하였다.
56) 하논성당은 1902년 7월 타케 신부가 본당을 홍로로 옮겨 버림으로써 그 흔적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
다. 일제시대를 거쳐서 해방 직후에 하논마을에는 16가구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으나 4·3사건 때 군·경
토벌대의 소개작전으로 인해 주민들이 인근 호근리나 서홍리로 이주해버렸고, 마을은 1960년대 이후
대부분 감귤 과수원으로 변해버렸다. 때문에 하논마을과 하논성당 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과 기록상의 미비 때문에 성당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 하논성당은 논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는데, 당시 하논마을 민가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지적원도(1914년 제작)를 통해 보건대, 하논마을은 논으로 조성된 지대의 남쪽 일부 면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로를 따라 양쪽으로 분포한 민가들의 중심부에 하논성당은 위치하고 있었다.
2001년 출간된 천주교 제주교구의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에는 서귀포교회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 일대로 하논성당 터 위치를 추정하여 놓았다. 발표자가 하논성당의 위치를
고증하기 위해 면담한 강두선(姜斗先, 1933년생, 1949년까지 하논지역 거주)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
의 고모 진술을 근거로 서귀포시 호근동 131번지로 추정하였다.
57) 「뮈텔문서」 1901-75, 1901년 6월 12일.
58) 「뮈텔문서」 제주-82, 1902년 6월 17일.
59) 「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2년 6월 17일자 서한 ; 1902년 7월 20일자 서한 ; 1902년 9월 4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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