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taquet_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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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성사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예비신자  수  100명은  모두  남자들로서,

                  대부분  교안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로  보인다.  타케  신부는  이들이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고,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신자로  확보하는  데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29)





                    3.  계속되는  교・민  갈등


                    1901년  제주교안  직후  교회  측은  교민  피살이  있은  뒤에도  제주사회의  분위기가  교회
                  측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형성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교민들은  자기들에  대한  살해는  보상
                  을  받고,  살아남은  교민들은  약탈당하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마을마다  교민
                  들의  배교가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민군의  지도자들을  동정하고,  피살된  교민들과  살아남은

                  교민들에게는  비난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찰리사  황기연이  민군  측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의
                  존하여  사건을  처리함으로써,  공직에  있던  교민들이  면직되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교안의
                                                                                              30)
                  진원지였던  대정군의  교민들은  더욱  심한  피해를  입었다.                 31)
                    제주  교회는  당시  여러  마을에서  주민들의  교민에  대한  박해가  사사로이  이루어지고  있
                  다고  보았다.  교민들을  ‘법국  새끼’로  취급하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라크루  신부는  9월에  이

                  르러도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민들을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돕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남녀  교민들을  ‘도가’라는  공공건물에  모아  놓고  그들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옷  벗는  것
                  과  때리는  것을  보게  하였고,  아이들도  부모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한  교
                  민은  색달리  강상호가  여신자들을  자기  방에  불러들여  문을  잠그고  옷을  벗게  하고  매질을
                                      32)
                  하였다고  진정하였다.   불타버린  교민들의  집은  한동안  다시  짓지  못하였다.                       33)
                    교안이  끝난  후  제주에는  중앙으로부터  여러  관리들이  파견되었다.  당시  제주교회는  이러
                  한  지방관들을  계속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불신하였다.  교회  측은  제주교안의  이면
                  에  대정군수  채구석과  같은  지방관들의  반교회적인  입장이  작용하였다고  파악하였기  때문
                  에,  교회의  지방관에  대한  반감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우선  교회  측은  신임  대정군수  허철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고,  “마

                  을의  우두머리들에게  교민들을  단죄토록  하고  그들에게  벌금을  내리고  태형을  가하며  중노
                  동형을  부과하도록  허락”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교민들을  탄압하는  강상호와  그  일당이  대
                                                            34)
                                                            35)
                  정군수와  향교  회장의  측근들이라고  하였다.   또한  교민들이  군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불신하였다.                36)


                  29)  본당별  교세통계표 홍로본당(1902∼1903)  참조.
                  30)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6월  20일자  서한.  “교민들이  백정보다  더  멸시당하고  있다.  그들
                     은  예전에  있던  모든  일자리에서  떨어져  있다.  남아  있는  교민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심’을
                     얻도록  굳게  결심을  하고  있다.”(「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14일자  서한).  실제  향리층
                     교민들이  배제되는  사례가  확인된다.
                  31)  뮈텔  주교  일기 1901년  8월  26일.
                  32)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28일자  서한.
                  33)  위와  같음.
                  34)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14일자  서한.
                  35)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1년  9월  28일자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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