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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중 사건에서 보듯이, 이미 향촌사회에 일본세력의 침투가 이루어짐으로써, 교회와 일
본세력이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는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대응 자
세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된 것이었다. 이로써 제주교안을 겪은 뒤 천주교회는 제주지
역 내에서 사회세력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그 영향력은 서서히 일본세력에게 전이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4. 홍로성당으로 이전
1) 김원영 신부의 하논성당 설립
하논성당 부지와 본당 및 사제관으로 사용할 초가집을 구입한 김원영 신부는 우선 부지
를 매입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저는 페네 신부님이 안 계신 동안에 두 말 두 되지기 보리밭 한 뙈기를 145냥에 샀습
니다. 이렇게 한 것은 페네 신부가 서울로 올라가시며 집이나 과원을 좀 사보라고 말씀하
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성칠이라는 신문교우를 통해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위에서 말
한 밭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외교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밭 위와
아래에 300가구의 많은 외교인들이 살고 있고 생수도 가까이에 있으며, 100보가 못되는
거리에 신문교우들이 살고 있습니다.”(뮈텔문서 1900-38, 1900년 3월 22일)
“저는 라크루 신부님의 배려로 논이 많아서 한논(大畓)으로 불리는 정의군의 마을로 교우
들과 상주하기 위해 며칠 후 떠날 것입니다. 저는 교우 집 하나를 빌려 본당 집을 살 때까
지 거기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뮈텔문서 1900-75, 1900년 6월 10일)
따라서 하논성당 부지는 하논마을의 주민 최성칠의 집 가까이에 있는 밭을 매입하였으며,
이 부지에서 가까운 초가집을 매입하여 성당을 신설한 것으로 보인다. 하논성당 부지가 있
던 밭의 북쪽인 호근마을과 하논마을을 포함하여 거주민은 300가구가 분포하고 있었다.
1904년에 작성된 三郡戶口家間摠冊에는 당시 호근리(하논마을 포함)의 연가가 267호이
고, 남자 566명, 여자 584명 합계 1,150명이라 하였다. 이 당시 와가는 없고 초가 1,053
호가 있었다고 하여 김원영 신부가 밝힌 수치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하논마을의 주민 수
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축교안이 일어나기 직전 조사한 교세통계표에는 신자 50명, 예
비신자 70명 등 총 120명의 하논마을 교민이 거주한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200명 가까운
주민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김원영 신부가 언제 본당으로 쓰일 초가집을 매입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분명
하지 않다. 그러나 1901년 1월 28일자 서한을 보면, “지금 예비자들이 근 400명이 되고
영세자는 50명입니다. 그간 4칸 집과 집 마당까지 주일과 첨례 때 사람들로 가득 찰 정도
로 크게 변했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논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본당으로 활용
할 4칸 집 초가집을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56)
청 건물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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