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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명에서 35명으로 줄어들었다. 예비신자는 600여 명에 달하다가 6명밖에 안될 정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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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신자들은 하논에 33명, 색다리 2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예비신자 46명을 포함하여
65명의 교민을 확보했던 색다리 공소는 교안으로 인하여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성내 대로동 본당의 경우, 신자 59명 중 25명만이 정기적인 성사를 보고 있고, 나머
지 신자들도 그다지 열성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교안 당시 제주읍내로 피신하여
온 제주 남부의 하논본당 소속 교민들이 원래 거처지로 돌아가기를 꺼리자, 대로동 본당의
라크루 신부는 이들의 교적 이동과 식량 문제의 해결로 어려움을 겪었다. 25)
지역별 교세의 전체적인 추이를 다음의 표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 제주도 지역별 교민 수(1899∼1910) >
시기
1899∼1900 1900∼1901 1901∼1902 1902∼1903 1903∼1904 1909∼1910
지역명
제주군 20(10) 104(?) 59(?) 50(?) 90(?) 207(25)
대정군 ?(?) 37(239) ?(?) ?(?) 14(30) ?(?)
정의군 ?(20) 101(382) 35(6) 60(100) 87(131) 195(14)
계 20(30) 242(?) 94(?) 110(?) 191(?) 402(39)
(출전 - 본당별 교세통계표(1899∼1910). 괄호 밖은 신자 수, 안은 예비신자 수)
제주본당(제주군)의 교세는 1903년 초부터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예전보다 활기는
없지만 예비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성탄 때 10명을 영세시켰고, 제주도 주둔 군
인들 가운데 일부가 입교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안의 영향이 미처 가시지는
않았다. 목포에서 오는 자들이 목포 사람들은 제주 교민들이 또다시 학살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전함으로써, 교세 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그런 중에도 1902년 5월 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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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피정을 다녀온 이후 일부 신자가 교회에 복귀하여 1903년 3월 현재 새로운 영세자
를 포함하여 신자 수는 50명으로 늘어났고, 예비신자의 수는 늘기 시작하였다.
하논본당(대정군・정의군)의 경우, 1902년 4월 20일 무세 신부의 후임으로 타케(Taq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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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宅基)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가 하논본당에 도착하였을 때 계속
종교의례를 지키는 신자는 서너 명에 불과하였고, 교안의 여파로 하논 마을에는 거의 과부
들뿐이었다. 1902년 새로이 영세를 받은 신자는 8명에 불과하였다. 당시 신자 수가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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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라고는 하나, 그 대부분은 이전 김원영 신부 때 신자들이다. 이들은 교안 이후 원래 거
처지로 복귀한 자들로서 신앙생활을 중단한 자들이 많았다. 타케 신부는 김신부 때 영세
받은 자들 가운데 5∼6명이 성당에 나오지 않고, 나머지 신자들 중 일부는 나오기는 하지
24) 본당별 교세통계표 하논본당(1901∼1902) 참조.
25) 본당별 교세통계표 제주본당(1901∼1902) 참조.
26)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3년 1월 12일자 서한.
27) 타케 신부는 5월 31일 제주에 도착하였고, 6월 9일 하논본당에 정착하였다(「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2년 6월 17일자 서한).
28) 세례대장을 보아도 부임 이후 1903년까지 확보한 신자 수는 12명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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