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taquet_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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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명에서  35명으로  줄어들었다.  예비신자는  600여  명에  달하다가  6명밖에  안될  정도였

                                                                           24)
                  다.  신자들은  하논에  33명,  색다리  2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예비신자  46명을  포함하여
                  65명의  교민을  확보했던  색다리  공소는  교안으로  인하여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성내  대로동  본당의  경우,  신자  59명  중  25명만이  정기적인  성사를  보고  있고,  나머
                  지  신자들도  그다지  열성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교안  당시  제주읍내로  피신하여

                  온  제주  남부의  하논본당  소속  교민들이  원래  거처지로  돌아가기를  꺼리자,  대로동  본당의
                  라크루  신부는  이들의  교적  이동과  식량  문제의  해결로  어려움을  겪었다.                    25)
                    지역별  교세의  전체적인  추이를  다음의  표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  제주도  지역별  교민  수(1899∼1910)  >

                                  시기
                                 1899∼1900   1900∼1901    1901∼1902   1902∼1903   1903∼1904   1909∼1910
                      지역명
                       제주군           20(10)            104(?)        59(?)        50(?)          90(?)        207(25)
                       대정군             ?(?)        37(239)          ?(?)          ?(?)          14(30)          ?(?)
                       정의군             ?(20)      101(382)        35(6)        60(100)          87(131)        195(14)
                        계            20(30)      242(?)        94(?)      110(?)        191(?)        402(39)
                           (출전  -  본당별  교세통계표(1899∼1910).  괄호  밖은  신자  수,  안은  예비신자  수)



                    제주본당(제주군)의  교세는  1903년  초부터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예전보다  활기는
                  없지만  예비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성탄  때  10명을  영세시켰고,  제주도  주둔  군
                  인들  가운데  일부가  입교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안의  영향이  미처  가시지는
                  않았다.  목포에서  오는  자들이  목포  사람들은  제주  교민들이  또다시  학살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전함으로써,  교세  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그런  중에도  1902년  5월  라크루
                                                                     26)
                  신부가  피정을  다녀온  이후  일부  신자가  교회에  복귀하여  1903년  3월  현재  새로운  영세자

                  를  포함하여  신자  수는  50명으로  늘어났고,  예비신자의  수는  늘기  시작하였다.
                    하논본당(대정군・정의군)의  경우,  1902년  4월  20일  무세  신부의  후임으로  타케(Taquet,
                                                                 27)
                  嚴宅基)  신부가  부임하여  교세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가  하논본당에  도착하였을  때  계속
                  종교의례를  지키는  신자는  서너  명에  불과하였고,  교안의  여파로  하논  마을에는  거의  과부
                  들뿐이었다.  1902년  새로이  영세를  받은  신자는  8명에  불과하였다.   당시  신자  수가  60
                                                                                  28)
                  명이라고는  하나,  그  대부분은  이전  김원영  신부  때  신자들이다.  이들은  교안  이후  원래  거
                  처지로  복귀한  자들로서  신앙생활을  중단한  자들이  많았다.  타케  신부는  김신부  때  영세
                  받은  자들  가운데  5∼6명이  성당에  나오지  않고,  나머지  신자들  중  일부는  나오기는  하지



                  24)  본당별  교세통계표 하논본당(1901∼1902)  참조.
                  25)  본당별  교세통계표 제주본당(1901∼1902)  참조.
                  26)  「뮈텔문서」,  라크루신부의  1903년  1월  12일자  서한.
                  27)  타케  신부는  5월  31일  제주에  도착하였고,  6월  9일  하논본당에  정착하였다(「뮈텔문서」,  타케신부의
                     1902년  6월  17일자  서한).
                  28)  세례대장을  보아도  부임  이후  1903년까지  확보한  신자  수는  12명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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