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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젊은 선교사들이 전쟁에 소집되면서 에
밀 타케 신부는 제주도 하논-홍로 본당을 떠나 목포 산정동 성당-나주 계량 본당(현 노안
본당의 전신)-남서해안 모든 섬들의 공소를 겸임해 선교 사목을 묵묵히 수행했다. 제1차 세
계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프랑스 선교사 대부분이 징집되는 바람에 제주 성당과 홍로 성
당은 성직자 없는 공소의 시기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게다가 가난한 제주도 청년들은 일
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떠났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신성여학교가 휴교되는 등 제주도 천주교
는 침체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22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전남과 제주에서 철수하자마자 그해 8월 25일부터 대구교구
소속이었던 에밀 타케 신부는 거의 20년 동안 선교한 제주와 목포를 떠나 1914년 설립한
대구교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교수신부로 부임하여 한국인 신부 양성의 길에 들어서게 되
었다. 타케 신부는 1928년 10월 23일 성유스티노신학교 3대 교장으로 선임되었고, 1933
년 10월 30일 회갑잔치를 하였으며, 1952년 1월 27일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선종하였다.
무엇보다 타케 신부는 18년 동안 대신학교 교수신부로 있으면서 12년은 대신학교 학장
으로 일하였다. 1964년 12월 15일 대구교구청에 화재가 발생해 에밀 타케 신부의 유물과
많은 표본과 관련 문헌들이 다 소실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타케 신부의 귀중한
표본은 우리나라에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1940년 7월 타케 신부는 신학교
학장직이 자신에게 너무 과중하다 여기고 사임을 했다.
에밀 타케 신부는 24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945년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일본에 의해서 직간접으로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 가톨릭교회의 친일 행
태를 어떻게 느꼈을까? 뮈텔 주교나 1933년 드망주 주교가 교회와 교회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사 참배’ 허용을 대안으로 선택한 것을 에밀 타케 신부는 인정했을까? 그에게 닥
친 고통은 신사 참배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포항 오천 예수
성심시녀회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타케는 한 달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진 무서
운 전투를 목격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10월 1일에야 다시 신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타케 신부는 침구류는 물론 속옷까지 모두 빼앗긴 상태로 오직 남은 것은 하느님밖에
없었다.
타케 신부는 조선 남서해안의 모든 섬들을 전담했다. 그의 직무수행은 매우 힘들었다.
14)
거의 모두가 허술한 배를 타고 여행해야 하는 위험의 연속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잘 통용
되는 방식이 이곳에는 잘 먹혀 들어가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방식이 매우 피곤
14) “중기선을 타고 14시간 걸려 도착한 제주도는 10년 동안이나 라크루 신부와 타께 신부에게 굳건한
덕성과 인내심을 갖게 합니다. 그들은 대학살이 있었던 1901년부터 주의 은총이 재난으로 입은 상처
를 아물게 해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교난 이후 몇몇 여인들과 어린이들만이 그곳에 남았지
만 현재는 교리도 잘 배우고 수계도 잘하는 교우 수가 400명이나 됩니다. 두 신부는 매우 진지해 보
이는 1,500명의 예비자들을 등록시키게 되어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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