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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동네를 오갔을 것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9)
1904년 타케 신부는 성인 35명을 영세시키는 기쁨을 누렸고 미사를 드릴만한 공소도 몇
곳에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09년 제주도는 두 개의 본당과 349명의 신자
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굉장히 느리지만 발전적이었다. 그리고 타케 신부는 산속에 또 하나
의 공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포리 신부가 타이베이에서 1915년 7월 4일 갑자기 병으로
별세하자, 타케 신부 또한 선교의 도구로 활용했던 식물 채집을 내려놓지 않았나 하는 생
각이 든다. 홍로 성당은 1915년 6월 7일 에밀 타케 신부가 목포 산정동성당으로 전임되면
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922년부터 제주와 전남에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철수하게 되자 에밀 타케 신부는 대구신
학교에 교수신부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1937년 8월 15일 서귀포본당이 하논과 홍로를
거쳐 현재의 서귀포성당으로 이전하면서 하논과 홍로성당은 역사의 한편으로 물러나게 되
었다. 에밀 타케 식물원 격이었던 홍로본당 시절의 사제관과 소성당은 애석하게도 1967년
1월에 철거되었다. 서귀포의 옛 홍로성당 터에는 지금 면형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홍로성
당은 타케 신부가 1915년 목포성당으로 전임된 뒤 공소로 바뀌었다가 이후 한국순교복자
수도회에서 관리했다. 10)
1908년, 드디어 타케 신부는 포리 신부의 코칭 없이 혼자의 힘으로 해발 600미터 지점
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해, 1912년 독일 베를린대학 쾨네(1849~1918) 교수에게 표본(채집번
호 4638번)을 보낸다. 발견 장소는 한라산 북측 관음사 뒤쪽이라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또한 100년 동안 참혹한 박해 속에 옹기를 팔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선조 교우들의
가난을 체험한 타케는 성당을 짓고 영세만 주는 것에 부족함을 느꼈기에 식물 표본을 만들
어서라도 선교 자금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도토리라
도 주워 먹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타케는 귤을 통해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그리
고 공동체적 가치를 융합하기 위해 포리 신부에게서 귤 묘목을 받았던 것이다. 타케 신부
는 그 지역의 문화나 습성, 그리고 생태와 자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에 비해
김원영 신부는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과격하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선교를
하여서 결국 신축교안이 발생했던 것이다. 11)
9) 그리고 서한의 내용을 살펴보면 라크루 신부는 1909년 10월 18일 오늘날의 초등학교 격인 신성여학
교를 세우는데, 이미 1년 전부터 여러 대안들을 모색하는 가운데 학교를 세우려고 기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산포에 주임신부로 소임 받은 무세 신부가 1910년 9월 초등교육기관인 ‘성지학교’를
세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인다. 신성여학교는 라크루 신부가 전임되고 난 뒤 1916년에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 등이 겹쳐 폐교되었다가 1946년 스위니(1895~1966) 신부에 의해 ‘신성여자중고등학
교’로 복교되었다.
10) 앞의 책, p 49-74 참조.
11) 에밀 타케 신부는 제주 식물학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식물분류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한국 식
물 연구사에 있어서 타케 신부와 포리 신부의 식물 채집 기록은 1890년대 코마로프(1869~1945, 구소
련의 식물학자로 그의 이름을 딴 코마로프 식물 연구소가 2015년 12월, 1886년~1902년 사이 전 구
한말 시대의 한국 관속식물 표본 100여 점을 기증)와 1909년 나카이(1882~1952, 일본 식물학자로 한
국의 식물 조사와 식물 자원 수탈에 행적이 많은 인물)가 『Flora of Korea』를 발표하기까지의 빈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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