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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조선이  정교분리를  주장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뮈텔  주교와  은총의  역할을  과장되게  설
                  명하는  얀세니즘과  엮이지  않았다면  한국  가톨릭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얀세니즘은  인간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면서  원죄  이후의  죄  많은  인간을  강조하며  인간성과  몸의  가치를  극단

                  적으로  부정했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엄격성과  보수성을  강조하다  보니  초월적이며  개인주
                  의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신앙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얀세니즘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이단설로  판정받았다.         5)


                    당시  에밀  타케  신부는  졸지에  제주도  하논에  오게  된  이유는  신축교안으로  상처를  받은
                  무세  신부가  의욕  상실로  하논  성당에서의  사목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자  주교로부터  인

                  사  부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하논에  다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됐고,  무세
                  신부는  하논에  더  이상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타케  신부가  하논에  가게  된  것이다.
                  타케  신부는  하논  성당에  부임한  즉시,  한라산이  잘  보이고  하논  분화구에서  가까운  서홍
                  동  홍로로  성당을  옮겨버렸다.  신축교안으로  만신창이가  된  하논  성당을  서홍동  홍로성당으
                  로  이전함으로써  새로운  판을  만든  것이다.             6)



                    어쨌든  이로써  타케  신부는  하논  본당  시대를  끝내고  13년  사목생활을  하게  되는  홍로
                  본당  시대의  막을  열었다.  1903년에는  30명의  영세자가  있었고,  200여  명이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04년에는  성인  35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고,  1905년에는  157명이
                  나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1909년까지도  제주도에는  겨우  두  개의  성당만  있을  뿐이었고,

                  공소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도  신자는  불과  349명에  지나지  않았다.  교세의  확장은
                  매우  더딘  것이었지만,  대학살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혈맥이  꽉  막힌  고정관념과  편견을  걷
                  어내며  제주민의  마음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7)


                    또한  그의  선교활동  업적  가운데  두드러지는  점은,  타케  신부의  식물  채집  행적이  등장

                  하는  이  서한으로서  그래서  귀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이  자료를  보면  타케는  포리  신부
                  의  수제자나  다름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포리  신부는  초창기  일본  식물학에  지
                  대한  공헌을  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일본  파견  선교사였다.  포리  신부는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활동했으며,  조선을  세  번  방문해  서귀포  홍로성당의  타케  신부에게  선교  외에


                  5)  앞의  책,  29-44  참조.
                  6)  1902년  6월  17일에서  7월  20일  사이에  타케  신부는  빚을  내어  하논에서  5리  떨어진  서홍동  홍로에
                     집  한  채를  얻어  성당을  옮겼다.  신축교안으로  하논  본당  신자  수는  187명에서  35명으로  격감했고,
                     흉흉한  민심에다가  흉년은  2년째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타케  신부의  주머니는  늘  적자여서,  뮈
                     텔  주교에게  자주  돈타령을  하곤  하였다.  타케  신부의  고백에  의하면  빚이  330  피아스트르라고  하였
                     다.
                  7)  1911년  대구대목구가  생기면서  제주도는  대구대목구에  병합되었고,  타케  신부도  대구교구에  소속됐
                     다.  타케  신부는  1915년  6월  목포로  발령이  났고  라크루  신부도  제주를  떠났다.  타케  신부는  제5대
                     본당  신부로서  목포성당(1915~1922년)을  책임지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제주도  홍로공소와  남서부의
                     노안성당을  돌보았다.  그리고  전남  지역과  목포의  수많은  섬들의  사목  방문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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