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taquet_symposium
P. 12
타케 신부가 조선에서 보낸 시간은 총 55년이다. 재임기간 중, 대구에서 교육자로 31년
을 지냈고, 제주도에서 선교사와 식물 채집가로 13년을 지냈으며, 남도에서는 목포와 나주
지역을 포함해 섬들과 내륙의 수많은 공소에서 7년을 지냈고, 부산과 진주, 마산에서 4년
을 지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도 타케 신부는 징집 대상에서 면제되었
기 때문에 그는 두 번 다시 프랑스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결국, 조선에 입국한 후 한 번
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구 남산동에 묻혔다.
1899년 6월 29일, 첫 소임지 부산본당에서 에밀 타케 신부는 약 1년간 사목하다가 진주
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된다. 타케 신부가 진주로 갈 것을 자원했고, 주교에게 진
주본당 설립을 건의했던 것이다. 부산에서 진주를 거치면서 에밀 타케 신부는 다양한 현장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선교사로서의 자신감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그는 무세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로 가게 되는데, 적응과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
어 제주도 선교를 포기하고 마산포로 갈 수밖에 없었던 무세 신부와 비교해 성공적인 선교
를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신축교안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서 13년,
그리고 목포에 축을 둔 전남권에서 7년 동안의 선교 사목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적어도 부산, 진주, 마산, 동막골, 통영, 함안, 고성 등지에서 현지 적응훈련을 어느 정도는
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 후 타케 신부는 1902년 4월 20일 라크루 신부와 동반해 마산
포를 떠나 서귀포 하논 본당(한논 본당이라고도 함) 제3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마산포
에서 제주 하논으로 가게 된다. 하논 본당은 1900년 6월 12일에 설립된 제주 산남 지역
2)
최초의 성당이다. 1902년 6월 27일에는 서홍동 홍로본당으로 이전했다가 1937년 8월 15
일, 지금의 서귀포성당으로 이전 정착한다.
당시 김원영 신부가 쓴 『수신영약』은 1901년에 집필한 것으로 총 43장 분량인데 천주
교 교리의 특징, 천주교에 대한 제주민들의 의식, 제주도 풍습과 미신 등의 내용이 기록되
어 있다. 그러나 『수신영약』의 내용은 제주도 민중과 그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내용이었
고, 지역 및 향촌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지역 사회는 방성칠의 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안 된, 화전세 징수에
대한 화전민에 대한 불만, 지역 사회의 배타적인 성격과 문란한 풍습, 일부 신자들이 치외
법권적인 신부의 특권을 남용함에 의한 주민들 사이의 갈등, 서구 우월주의에 따른 제주
고유 신앙 세력과의 충돌, 성직자들의 지나친 간섭과 전교 우선주의 등 이미 문제를 안고
있었던 이러한 요소가 세금 징수관 강봉헌이 신자들을 이용한 강압적인 세금 징수로 인해
결국 신축교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신성학원 100년사』, 32쪽
김 신부는 1901년 4월 사제피정으로 서울에 갔다가 5월에 하논 성당에서 발생한 신축교
2) <에밀 타케의 선물>, 정홍규, 다빈치, 2019, p 13-22 참조.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