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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소식을 듣게 된다. 뮈텔 주교는 김신부가 다시 하논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뮈
텔 주교가 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는지, 혹은 신축교안에 대한 문책으로 그렇게
조치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에서 토착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나아가지 못했다. 해당 선교 지역의 관습과 문화, 역사와 전통에 대한 깊
은 존중과 통찰을 강조하였던 예수회의 선교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3)
김원영 신부의 미간행 저서인 『수신영약』 또한 일종의 호교서이자 교리책이지만 제주
민들의 삶의 뿌리인 풍습, 관습, 생활양식, 신앙체제를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고 하루아침에
천주교의 신앙으로 바꾸려 하다가 결국 교안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의 훈련을 반영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지침인 ‘모니타’를 보면 세 가지가 두드러
지는데, 첫째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구원을 통한 사도직의 성화, 둘째는 비신자들의 개종, 셋
째는 교회 조직의 건설이었다. 『수신영약』은 이 세 가지 지침을 따르고 있지만 결정적으
로 지역의 문화나 전통을 존중하라는 모니타의 또 다른 중요한 지침은 지키지 않은 셈이
다. 유럽적인 신앙관습을 이식하지 말라는 교황청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전교회는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당시 뮈텔 주교는 조선 제8대 교구장으로, 1891년 2월부터 1911년 3월까지는 조선 교
구장으로, 대구교구가 분리된 1911년 4월 8일부터 1933년 1월까지는 서울 교구장으로 재
임하며 한국 가톨릭의 기초와 바탕을 이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뮈텔 주교의 정교
분리 종말지향의 내세관은 조선의 신자들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역사로부터 멀어지게 하
였다. 이런 태도는 지금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제
주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인 제주 신축교안을 해결하는 과정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
면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고 진단된다. 4)
초기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근대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 성속
이원론에 토대한 초월주의 신앙 유형 및 내세주의 신앙은 사회 문화 활동의 폭을 크게 제
한하였다. 또한 문화적 우월주의적인 태도와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행세는 그들이 전개하는
그 나마의 활동도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이나 내재적 요구, 그리고 역사적 현실과는 유
리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이 주도하는 개화기의 한국교
회는 교회 정신과 단절되는 한편 민족사와도 단절되는 이중단절의 부정적 측면을 나타내게
3)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7월 29일에 창설하여 현재까지 361년을 이어오고 있는 선교단체다.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국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였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1883년)처럼,
일본이 조선을 지배(1910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여기에 항거한 선교사는 거의 없었다. 가톨릭
선교사의 민낯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원주민의 반야만적인 성격과 문란한 풍습.. 합법적인 결혼을 한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이 뮈텔 주교의 보고서들을 보면 신축교안은 영혼구령 ‘쿠라 아
니마룸’의 가치관과 제주도의 ‘전통과 풍속’의 가치관 충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 1911년 2월 21일, 뮈텔 주교 자신이 독일에 가서 조선 학교 진출을 위해 직접 초대한 베네딕도회 총
장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조선을 방문하였다. 두 수도회의 리더는 조선 선교에 있어서 선교 방법과
목적이 전혀 달랐다. 한쪽은 오직 개인 영혼구령만이 구원사업이라고 생각했다면, 다른 한쪽은 뼈저
리게 가난했던 조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사구시를 통한 영혼구령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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