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taquet_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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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 신부는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식물 채집가가 된 것은 아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
과 1896년 교민조약 이후의 정교분리 정책 등 복잡한 시대 상황 속에서 포리 신부와의 만
남은 타케 신부를 자연스럽게 식물 채집가의 길로 이끌었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 이방인이
선교를 한다는 것은 인내와 용기가 절실히 요구되던 일이었다. 식물 채집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었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의 정교분리 정책에서 나온 선교사의 방편이었
는지도 모른다.
당시, 1898년 부산본당의 3대 주임신부였고, 1899년 진주본당 설립에 이어 1900년에는
마산본당 초대 주임신부를 거쳤던 타케가, 1902년 4월 20일 하루아침에 제주도 하논 본당
의 주임신부로 오게 된 배경에서도 사실 식물과의 특별한 관계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
저 당시 상황이 자연스럽게 얽혀 타케를 제주도에 데려다놓은 것이다. 타케 신부는 제주도
한라산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는 등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만약 1899
년 제주도가 오로지 초월을 추구했던 파리외방전교회와 엮이지 않았다면 신축교안이 일어
났을까? 물론 가정일 뿐이고 시간은 비가역적인 것이라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13)
또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선교자들의 군대 소집으로 여러 본당의 주임 신부
자리가 공석이 되자, 대구교구 교구장 드망주 주교는 제주 서귀포 홍로 성당에서 목포 산
정동성당으로 에밀 타케 신부를 발령냈다. 징집 면제를 받은 타케 신부를 통해 공석이 된
여러 본당을 메꾸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에밀 타케 신부의 공식적인 식물 채집활동은
1906년 시작해 1913년에 매듭지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타케 신부는 1922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로 가기 전에 전쟁에 동원된 카다르 신부의
목포 지역 후임자로서 소임을 다한 것뿐만 아니라 역시 전쟁에 동원된 계량성당 주임신부
카다르의 임무까지 맡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빈자리를 지켜야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1922년 제주도와 전라도에서 철수했으며, 1931년에 전라도가 대구교구 감목대리
구로 승격됐지만 2년이 채 되기 전에 드망주 주교는 전라남도 지방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계량성당은 카다르 신부가 세계대전에 소집됨으로써 제대할 때까지
5년 동안 목포 산정동 성당의 에밀 타케 신부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 1919년 프랑스
에서 계량에 다시 돌아온 카다르 신부는 중단됐던 공사를 마무리했고, 장성, 영광, 함평 답
정리, 나산, 나주 봉황면 등에 공소를 열었는데, 당시 교우 수는 300명이었다.
당시 1911년부터 1930년까지 대구교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관리했고, 전라도는 제주도
를 포함했다. 1931년 5월 10일, 즉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에 대구교구장 드망주 주교가
교구를 나누는 것을 허락받고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했다. 1899년과 1931년 사이에 타
케 신부의 선교활동은 목포, 계량(노안), 제주, 홍로, 이 네 본당과 이들 본당의 공소를 중
13) 앞의 책, 77-1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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