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taquet_sympos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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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하였지만,  빌린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오래  묵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감당하기가  쉬

                  웠다.  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할  수  없는  침착함과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타케  신부는  다행히도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들  누구보다도  적임자였다.


                    그는  말했다.  “저는  나쁜  마음에서가  아니라  무지한  까닭에  죄를  범하는  이  불쌍한  섬사

                  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관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정신  상태는  불가해합니다.  주교
                  님도  그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려고  진력해보십시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에는  그들이  받아들인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나쁜  마음
                  에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압니다.  진실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지
                  는  못하고  정신  속에  스며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규제할  수  있을  정도가  못  됩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그들을  알  수  있는  신부와의  충분한  접촉입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그들을  알  수  있는  남녀회장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전교회장을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사업을  위해서는  이곳  공소에서  살고  있는  회장들,  즉  그다지  교육을  받지  못한
                  신입교우들로서는  충분치가  못합니다.  선교사는  배로  여행하기도,  여인숙에  오래  묵는  것도
                  매우  힘든  겨울이  아니라  가을에  순회  여행을  해야  합니다.  매일  저녁  불과  몇  사람에게
                  성사를  베풀  뿐이라  하여도,  각  공소에서마다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

                  가  있는  섬과  이웃  작은  섬에  살고  있는  교우들에게는  통지가  전달되어  저에게도  달려올
                  시간과  돌아갈  시간,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집을  지키고  있던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할  시간
                  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노력과  재력,  그리고  많은
                  실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이들  아름다운  섬들을  좋은  본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에밀  타케  신부는  조선의  땅,  여러  외진  곳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그의  선교하는  태도
                  와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1876년  개항과  1886년  한불조약으로  프랑스  함대의  비호
                  아래에서  고압적인  자세로  선교활동을  했던  프랑스인  조선  선교사의  시비지심과는  달리  타
                  케  신부는  선교사로서  측은지심의  깊은  덕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
                  여주는  이야기이다.



                    프랑스인  에밀  타케  신부가  자신의  문화적  우월감을  내려놓고서  조선인과  공감하려는  마
                  음을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에밀  타케는  명상에  몰두하고,  고매한  인격을
                  지녔으며,  의복  등에  사치함이  없고,  항상  프랑스식  둥근  검은  모자에  파이프  담배를  즐겼
                  으며,  검붉은  긴  수염에  홍안백발이며,  중키의  강건한  체력을  가졌다.”고  한다.  회갑  후

                  1940년  7월  타케  신부는  대신학교  학장직을  스스로  사임한  후  평교수로  지냈다.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타케  신부의  평소의  덕망을  보여주는  자세이다.


                    1944년  일제의  압력에  의해  대신학교는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에도  다시  문을  열지  못
                  하고  1945년  2월  일제에  의해  폐교되면서  일본  육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그  무렵  그는  샬

                  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의  지도신부로  지낸다.  1948년  대전교구가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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