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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채집과  표본  제작  방법도  전수하였다.



                      『초기  본당과  성직자들의  서한2』에는  타케  신부의  서한  18통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11통이  홍로에서  작성된  것인데,  서한  중에는  타케  신부가  제주도에  부임하자마자  하논에
                  서  홍로로  본당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것도  있다.  사실  그  당시  제주도  안

                  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있었고,  제주도  앞바다에는  프랑스  군함도  출병해  있었다.  그  군함
                  들은  선교사들의  든든한  심리적,  외교적,  물적  지원  부대였음이  틀림없다.  프랑스  함대가
                  출병한  것은  박해  종식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선교사  보호  차원의  종교적인  것이라고  해
                  도  결과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정책은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과  관계되어  있었고,  선
                  교사들도  자연히  자국의  제국주의  외교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제주도민들은  제주  앞바다에  등장하는  프랑스  함대를  보고  두려움을  느낀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는  왕
                  이  내린  신표를  가지고  있었고,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같은  권한을  누릴  수  있었기에  이  권력에  편승하여  신앙과  무관하게  입교
                  하려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른바  ‘갑질’은  신축교안의  한  원

                  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타케  신부의  18통의  서한에는  공소를  매입한  것,  이교도와의  갈등,  신축교안  희생
                  자  장례식,  식물  채집,  홍로본당  성사  내역표와  같은  교세  현황까지,  일종의  사목  보고서와
                  같은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또  서한을  보면  타케  신부는  제주도  홍로본당에  오기  전만

                  하더라도  사목지였던  부산,  진주,  통영,  함안  등에서는  식물  채집에  대한  관심이나  언급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식물  채집을  하게  된  동기는  역시  일본의  전
                  설적인  식물  채집가  포리  신부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서한에서  식물  채집이  언급된  날짜
                  는  1908년  1월  6일이다.  포리  신부의  식물도감에  대한  지적도  이  서한에서  나온다.  포리
                  신부는  1906년과  1907년  제주도  홍로본당에서  타케  신부를  만났다.



                    그  당시,  59세의  포리  신부와  33세의  타케  신부였으니  파리외방전교회  안에서는  선후배
                  신부라기보다는  마치  부자간  같았을  것이다.  포리  신부는  공식적으로  제주도에  세  번  온
                  걸로  기록되어  있다.  포리  신부는  1901년  5월  3일  일본  아오모리에서  대마도,  나가사키를
                  거쳐  5월  22일  서울  남산,  진남포,  북한산,  인천,  연변,  평양,  강원도,  원산,  부산,  목포  등

                  지에서  10월  초까지  머물다가  부산을  통해  시모노세키를  경유해서  일본에  다시  입국했다고
                       8)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홍로성당은  흙돌담,  즉  제주도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쌓은
                  초가집의  원시성으로  아주  소박했음에  틀림이  없다.  홍로성당  설립  당시  신자  20명으로  시
                  작한  이  소박한  땅에서,  검은  수단을  입고  긴  수염에  파이프  담배를  지닌  타케  신부가  친

                  8)  포리  신부는  1901년  5월  3일  일본  아오모리에서  대마도,  나가사키를  거쳐  5월  22일  서울  남산,  진남
                     포,  북한산,  인천,  연변,  평양,  강원도,  원산,  부산,  목포  등지에서  10월  초까지  머물다가  부산을  통해
                     시모노세키를  경유해서  일본에  다시  입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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