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사목교서
‘성령과 함께 희망을 바라보며 평화를 실천하는 소공동체’
교회는
지난 2021년부터 4년에 걸쳐 시노달리타스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안에서 함께 하는 여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경청과 존중을 바탕으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과정입니다.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시노드적
요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때로 상처받고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분명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바가 존재하기에
사제뿐만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이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교회의 여정에서 오늘날 심각한 위기 상황을 계속 진단하면서, 교회다운 우리의 책임감에 대해 새롭게 언급하고
계십니다. 또한 지난날 우리가 진행해오던 기계적이고 경직된 교회의 방식을 지적하십니다.
2025년도 가톨릭 교회는 희망을 담은 희년 순례를 다시금 선포합니다.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2025년
희년의 취지를 보면, “신앙인들은 구원의 통로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다 친밀하게 가져야 하고, 교회는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우리의 희망이라고 선포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서기 325년 5월에
시작된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1700주년이 되는 해가 2025년이라는
점을 교종님은 상기시키십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일치에 힘쓰는 기간이 돼야 한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2025년 희년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은 어떤
것인지를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
제주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아픔은 4・3입니다. 올해 제주 4・3은 77주년을 맞이합니다. 4・3으로 파괴되고 수난당한 마음의 상처를 서로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좋은 심성을 회복할 때, 제주도민들은 진정한 희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신앙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제주에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희년
정신이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시키는 것이라 할 때, ‘제주 4・3’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희년의 실천은 시대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가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가 올바른 평화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올해의 사목적 화두라고 여깁니다.
평화는
교회가 지향해온 소중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어떤 추상적인 명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회복과 실천이어야 합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는 우리 인간 삶의 품위를 온전한 평화의 계획 안에서 실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가진 탐욕과 교만, 부정과 불의로 말미암은 폭력적 양상은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비극적 현실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모든 전쟁과 분쟁의 중단, 빈곤과 부패와 범죄의 해방, 고령화에
따른 노인 문제 해결, 기후 위기와 생태 환경의 회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위협당하는 평화의 과제들이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걷기 위해, 가정과 이웃, 직장, 학교 등을 시작으로 모든 무관심의 현실을 연민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기를 권합니다. 또한 성령께 깊이 기도하며 주님께 청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이제 이러한 모든 섭리의 현실은 성령과 함께 성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인 다가가기’를 실천하는 도구이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한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핵인 가정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 가정이
이 핵심적이고도 필수 불가결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의
문화는 모든 이의 존엄과 선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하여 연대하고 참여하는 공동 투신입니다. 또한 이웃의
관심을 보이고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가짐, 연민과 화해와 치유의 마음가짐, 상호 존중과 환대의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문화는 평화 건설을
위한 특권적인 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세계 곳곳에서, 상처들을
치유하도록 이끄는 구체적인 평화의 과정들을 실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독창적이고 담대하게 치유와
새로운 만남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평화의 장인들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공허한 말이 아니라 확신에 찬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의 큰 유산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증거입니다. 그분들이 가진 순교 영성의 가치들이 시대의 징표로서 새롭게 한국 사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차별이나 반대, 거짓과 조작 없이 대화에 열려 있는 평화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서로 다른 견해와 이념을 뛰어넘어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확신에 찬 대화 없이는, 참 평화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언제나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며 법을 존중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상호 경청은 상호 이해와 존중으로 이끌 수 있고, 심지어 원수에게서조차 형제자매의 얼굴을 찾아보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의 여정은 지속적인 투신을 요구합니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실 환경은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므로 온전하게
다음 세대로 넘겨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리하도록 맡겨진 피조물 보호에 신중한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특별히 제주 사회의 문제 중 하나인 제2공항을 둘러싼 갈등과 긴장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올바른 식별의 잣대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 제주도민 모두가 앞으로 2~3년간의 환경영향평가라는 중대한
도전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 올바른 식별을 통해, 창조된
모든 실재의 상호 연관성을 온전히 인정하고 피조물의 부르짖음 모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일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주의 깊은 경청은 더 나아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대한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응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평화는 소중한 선(善)입니다. 평화는 우리 희망의 대상이고 온 인류의 열망입니다. 평화를 향한
희망은 실존적 긴장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긴장 덕분에,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온갖 어려움 안에서도 현재를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희망은,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애들이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여정을 시작하게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덕목입니다. 매 순간 우리 교회가
말씀과 성체의 신비를 통해 더욱더 성장하는 이 희망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2024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 창 우 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