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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목서한

사순절을 시작하며 모든 가정과 교형자매 여러분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기원합니다. 

최근 ‘코로나 19’의 감염 확산으로 인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이 시작된 중국에서는 불과 두 달 사이에 7만 명이 훨씬 넘는 환자가 발생하고, 2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많은 이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진정 기미에 있던 우리나라도 최근 급속도로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어, 청정 지역이던 제주에까지 확진 환자가 발견되니 많은 이들이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바이러스의 확산 경로와 속도에 전문가들도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지 못해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근래의 오래지 않은 기간 중에 다양한 재앙을 겪어왔습니다. 해마다 발병하는 구제역, 조류 독감, 사스(SARS:2003년), 신종플루(돼지독감: 2009년), 메르스(MERS:2015년) 등을 일으킨 변종 바이러스들은 현대 의료계의 역량과 기술의 한계를 넘어 우리를 위협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병들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희생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나, 돌이켜보면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았음에도 얼마 후에는 차츰 잦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재앙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바이러스들이 인간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오 6,26) 인간은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마지막에 출현한 최고의 생명체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바이러스는 세균(박테리아)보다도 덜 진화된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독자 생존능력이 없어, 반드시 다른 세포에 붙어야 생존이 가능한 미물 중의 미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귀하게 만드신 인간이 이런 미물에 정복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형제 여러분, 그보다 두려움의 바이러스에게 정복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하십시오.  

현 사태에 대한 지나친 위기의식과 공포심의 조장은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전염병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과 혐오 바이러스의 심리적 증식입니다. 혐오는 차별을 가져오고 차별은 폭력으로 발전합니다. 1923년 9월 일본 동경 인근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거짓 뉴스가 퍼지자, 일본 군경과 시민들이 흥분하여 6천여 명이 넘는 조선인과 이방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습니다. 이는 심리적인 혐오 바이러스가 일으킨 참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면하며 심리적 패닉 상태에 휩쓸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고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비난하고 배척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유럽 이곳저곳 식당이나 상점에서 중국인을 사절하고 손가락질 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벌어지고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주민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설 연휴 기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승차거부로 택시를 타지 못하고, 서울 홍대 앞에서 한 한국인이 중국인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하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인 집단 거주지로 음식 배달 서비스가 거부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중국인을 향한 혐오 발언과 행동들이 속출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땅을 빼앗겨 난민이 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많은 우리 동포를 이웃으로 맞아주었고, 임시정부도 그 땅에서 오래 신세지고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맞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당면하는 오늘의 이 현실을 우리 신앙 안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소화할 것인가 깊이 성찰하고 마음속에서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은 모든 인간을 세상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봉헌하신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우리도 예수님 발자국을 따라 속죄와 보속의 길을 걷는 여정입니다. 이 사순 기간에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함께 걷는 새로운 길을 찾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받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는 사제의 선포를 듣습니다. 지금 국민 대다수가 심한 폐렴증세를 일으키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 심리에 시달리고 있으나, 차분히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해마다 산업재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2천 명이 넘고, 교통사고로 죽는 이들이 3천 명이 넘습니다. 또한 해마다 독감으로 사망하는 이가 국내에 4-5천 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각박하고, 아무도 손을 내밀거나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한 해에 1만3천 명이 넘었습니다. 너무 많으니, 죽음이 무의미한 통계수치로 일상화되어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무디어졌습니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상실해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우리의 고질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순시기에 주변 이웃의 고통과 재앙에 대한 무관심과 무디어진 마음을 뉘우치고 새로운 복음적 결실을 거두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바이러스의 난동을 훨씬 능가하는 자비와 애덕의 씨앗을 뿌리고 고통 받는 이들과의 연대를 활발히 펼쳐가도록 합시다. 금년 사순절 사랑의 헌금은 시리아 난민과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2020년  2월 26일 재의 수요일에
천주교 제주 교구 감목
강 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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