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 땅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넘쳐흐르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창조주이신 당신께 거역하고 도전하여도,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고 징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려고 한없이 당신을 낮추시며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본성을 ‘자비’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주님은 우리가 죄악을 저질러도 자손 천 대에 이르기까지 참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그러나 죄악 자체를 결코 용인하거나 내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가장 작은 이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사악한 권력과 불의한 패거리들은 반드시 멸망시키시고 당신의 굳센 팔을 뻗으시어 단숨에 날려버리는 분이십니다.
성서 말씀은 주님이 힘없는 작은 이들, 고통 받는 이들 편에 서시어 악의 권세와 대신 싸워주시는 용사이심을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먼 곳에서 오신다. 노기가 충천하여 위엄을 떨치며 오신다. 분함으로 입술을 부르르 떠시며 혀에서는 불을 내뿜으신다. 휩쓸어가는 산골 물처럼, 목에 받치는 거친 숨을 내뿜으시며 오신다. 몰려온 민족들을 키질하여 날려버리러 오신다. 몰려온 백성들에게 재갈을 물려 꼼짝 못하게 하러 오신다.’(이사 30,27-28)
세월호 승객 304명이 깊은 바다 밑에 수장된 후 19개월이 지난 오늘 유가족들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사고의 원인과 경과에 대하여 의혹만 가득한 채 1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잊어도 사랑하는 이들을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히고 가슴에 묻은 가족들은 사고 당시의 충격과 고통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행정당국의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자세로 진실이 밝혀질 아무런 전망도 안 보이니 유가족들의 상처와 恨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라고 합니다. 국민 상위 1%가 전체 자산의 26%를 차지하고 있고, 상위 10%는 전체 자산의 66%를 소유하는데, 하위 50% 국민의 자산 비중은 1.9%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하위 50%의 자산은 2000년도에는 그나마 2.6%이었으나 2013년도에 1.9%로 감소하였고, 상위 10%는 2000년도 63.2%에서 2013년도 66%로 자산을 불려 왔습니다.(동아일보 2015.10.29.) 시간이 흐를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못 가진 이들의 박탈감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위정자들은 우리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기업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하고 고용할 유연성이 있어야 경제가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은 국민의 50%가 재화의 1.9%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불의한 현실입니다.
이미 이 나라 직장인의 50%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갈수록 조여드는 생활고와 불안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 절박한 외침과 호소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700조 원을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놓은 대기업들의 입장을 우선하는 사고와 정책으로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언제 구조조정과 명퇴 명단에 포함될지 모르는 불안으로 우울한 나날을 살고 있습니다. 금년 가을 기후 이상으로 밭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때, 국회는 중국과의 FTA를 비준하여 농어민들을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공무원도, 기업인도, 정치인도, 종교인도 이런 노동자, 농민의 고뇌를 받아주지 않고, 언론도 외면하고 있으니 그들은 어디 가서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거리로 나가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권력은 그 부르짖음을 불법이라고 단죄하고 억압하다 소요죄까지 거론하고 있으니 이들은 절벽으로 내몰린 심정입니다. 이러한 절벽에서 백성을 지켜내야 할 정치 지도자들은 이해관계와 분파로 집안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많은 이들은 희망을 잃고 자조와 포기 속에 주저앉을 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런 앞날의 전망이 안 보이니 자조와 냉소로 자신들의 세대를 벌레에 비유하기도 하고, 성공한 부모 덕분에 출발부터 특혜를 받은 이들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로 조소합니다. 오죽하면 이 땅을 구제불능의 지옥이라 저주하기도 하고 지옥에서의 탈출만을 꿈꾸겠습니까?
이사야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좌절과 자조에 사로잡혀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끌려간 북쪽 유배지에서 비천한 종살이가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을 잃었고, 자신들의 처지가 벌레와 구더기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이사 41,14-15)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스라엘의 작은 이들은 오직 이 예언자들의 말씀에 의지하며 희망이 안 보이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손수 개입하시고 구원자를 보내주실 날만을 기다리고 견디어 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다림의 날이 다 찼다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작은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의 존엄과 인권을 되찾아 주시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고자 어떠한 특권도 마다하시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 사시며 가난한 이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 상처 받은 이들, 빼앗긴 이들, 갇힌 이들, 슬퍼하는 이들의 형제가 되기 위하여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족도 포기하시며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고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이 땅의 모든 작은 이들 곁에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이 차별하고 억누르는 작은 이들, 폭력으로 빼앗고 억압하는 이들, 눈물짓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이들 곁에 그리스도는 이미 와 계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과 위로를 가득히 받으십시오.
2015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강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