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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이모저모

스페인 세계청년대회를 다녀와서.........

박선나 아셀라(연동성당)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번 순례여정의 모든 것을 이 구절에 담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청년대회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반가웠고,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이 고마웠으며, 여정 내내 기뻤다.

날 향한 예수님의 초대가 가장 반가웠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형식적인 신자일 뿐이었다. 기도생활과 멀어진 지는 오래였고 의무감 때문에 주일미사를 갔으며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몇몇 가톨릭 모임을 나가던 신자였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 날, 이렇게 이기적이고 차가운 마음을 가진 내가 과연 예수님과 가까워질 수는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성지에 들릴 때마다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하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혼자 숨겨두었던 어둠들을 조금씩 끄집어내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기도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누구에게도 편히 말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예수님께 말하다보니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무겁고, 닫혀있고, 냉랭했던 내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빈 마음, 열린 마음, 뜨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변화되어갔다. 일상에 지쳐 허덕이고 있던 나를 따뜻한 당신 품으로 안아주시려고 WYD까지 날 친히 부르신 것 같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 역시 반가웠다. 거리 곳곳에는 유치원생 마냥 빨간 배낭을 메고 노란 옷을 입고 걸어가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마치 명동 한복판을 생각나게 하는 수많은 인파였지만 명동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명동에서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고독함을 느끼곤 했지만, WYD에서는 미소 지으며 그들과 Hola!하고 인사하며 군중과 함께하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문화권도 전혀 다르고 처음에 말 걸기조차 힘든 외국인들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순례자로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던 이번 여정은 내게 ‘고마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하느님에 대한 고마움, 가족과 이웃에 대한 고마움, 환경에 대한 고마움까지 모두 돌아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WYD를 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 종교가 다름에도 딸이 순례를 떠나겠다고 하니 선뜻 허락해주신 부모님. 뒤에서 조용히 기도해주셨던 많은 분들.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유럽으로 떠날 수 있었던 환경. 이 모든 것이 ‘야훼 이레’(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였고, 소중함 그 자체였다. 전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만 눈에 보여서 내가 갖고 있던 것마저도 불만의 대상이었는데……. 내게 주어진 것 모두가 너무나도 고맙게 여겨졌다. 그저 버겁게만 느껴졌던 내 십자가까지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던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기도할 때 하느님께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아 보이는 길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은 내 생각과 반대되는, 아주 멀리 빙빙 돌아서 가는 힘겨운 길을 보여주신 게 대부분이었다. 남들보다 길었던 수험생활,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순탄치 않은 학교에서의 신앙생활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 십자가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내가 도망치기도 전에 붙잡으셨고 시련들을 통해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길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더 좋은 것들을 내게 안겨주셨다. 지금 힘겹게 느껴지는 십자가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꼭 알맞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라는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WYD기간에 내 마음은 몹시 기뻤다. 단순 여행객이 아닌 순례자로서 할 수 있었던 체험을 통해서 수능 이후에 점점 멀게만 느껴졌던 예수님이 WYD 기도문 제목처럼 우리의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많은 성당들을 들를 때마다 기도를 했는데 그 때부터 예수님과의 어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던 아씨시에서는 세속의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는 성인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창세기 연수 때도 쉽게 내려놓지 못했던 어두운 마음들을 내려놓으며 예수님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성 베드로 성당, 예수 성심 성당에서 한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매우 큰 은총이었다. 또 세비야 주교좌성당의 거대한 오르간 앞에서 무반주로 우리의 목소리만으로 불렀던 성가가 울려 퍼지던 순간, 십자가를 어깨에 대고 십자가의 길을 걷던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드리드 본 대회 때 레티로 공원 천막 기도소에서 기도하는 각 나라의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이 천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뜨거움으로 내 마음에도 작은 불씨 하나가 생겨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려 품에 안아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속사정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으면서 내가 큰 잘못을 해도 항상 이해해주는 든든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무표정이었던 내 얼굴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하며 기뻤다.

길면 길었고, 짧으면 짧았던 17박 18일간의 여정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올 수 있었던 반가웠고 고마웠고 기뻤던 날들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친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로 간구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순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나 홀로가 아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교회의 젊은이들과 함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기사 : 청소년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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