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2009년 춘계 총회를
마치면서
한국 천주교의 큰 기둥이요, 우리 주교들의 맏형님이셨던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종교의 유무를 초월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국민들이 고인의 영전에 조문하고 고인의 떠나심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주교들은 모두 큰 충격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조문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도 몇 킬로 밖에서부터 묵묵히 차례를 기다린 후에 김
추기경 곁에 다만 몇 초 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 기도하며 머물다 가신 모든 문상객의 고귀한 진심에 참으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김 추기경의
동료인 우리 주교들보다 더 숙연하고 더 애통해하는 침묵의 행렬에서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과 죄악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행렬과 같았습니다. 서울 뿐 아니라 지방 각처로, 심지어 해외로까지 이 행렬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이렇게 많은 분들을 고인 곁에 모이게 하였을까 놀랐고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고인의 빛은 지척에 있는 우리들보다 오히려 멀리 있는 분들에게 더 밝게 비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생전에 항상 온몸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벗이 되어주려고 하셨던 고인의 열렬한 사랑이 많은 이들의 영혼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랑을 일깨운 것 같았습니다. 추기경이라는 명예보다는
누구라도 격의 없이 만나고 어울리신 고인의 비움과 겸손의 광채가 멀리 퍼져나가 정말 많은 분들에게 애모와 감사의 정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친 아버지를 여읜 것처럼 고인의 영전으로 달려오신 것 같습니다.
주교총회를 마치면서 우리는 다짐합니다.
불안과 갈등과 절망으로 얼어붙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살려내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용기의 불씨를 댕겨주신 김 추기경의 발자취에
우리도 함께 뒤따르자고 다짐합니다. 미흡하지만 우리도 그분이 가신 발자국을 찾아 한 발씩 천천히 내딛으며 여러분들과 함께 이 나라, 이 땅에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가자고 다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근래에 없던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길이 잘 안 보입니다. 직장을 잃은 이들이 일자리를 되찾을 전망이 잘 안 보입니다.
주문이 끊겨 닫아버린 공장 문을 언제 다시 열 수 있을지 예측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기도, 전쟁까지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 시련도 주시지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역량도 주십니다. 금도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불로 단련을 받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혼도 단련을 받으면서 더 순수하고 굳건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굳게 신뢰하며,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매일 매순간에도 감사하고 서로를 아낀다면 머지않아 시련의 먹구름은 곧 걷힐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주교회의 봄 총회를 마치며, 2009년 3월 19일 한국 천주교 주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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