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천주교신앙 논고-김학렬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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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2007. 11. 20 김학렬 신부.
근래에 이르러 일부 식자들을 주축으로 엉뚱한 논리로 다산 정약용을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들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천주교의 근본을 흔들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시자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보고자 한다.
가. 다산 정약용 요한은 심약한 배교자였으나, 회개하고 보속하다가 천주교 신앙인으로 선종하였다.
1. 벽위편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인년 1806)에 사직 강준흠이 상소하기를 : 정약용이 반촌에서 흉적을 모으고 집에는 요망한 무리들을 길러서,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 그 사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병진년(1796)에 한 차례 상소하여 겉으로는 탈을 바꾼 것처럼 꾸몄으나, 실속은 성상을 속이는 계략이었습니다. 황사영의 백서에(여진천, 황사영 백서 해제, 1999 기쁜소식, 53참조) 이른바 “이가환 . 정약용은 겉으로 배교한 듯하지만, 가슴속에는 늘 끊어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 고 한 것은 저들의 심정을 사실대로 그려낸 것입니다.(벽위편, 한국천주교 박해사, 1987 명문당, p.322)
무자년(1828) 10월에 구언할 때, 예부좌랑 윤극배가 상소하기를: 사역의 괴수, 정약용은 19년 동안 바닷섬에서조차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편안히 고향에 돌아가 있을 때에는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신명처럼 받들어 섬겼으며, 또한 옥사로 가환. 관검이 도륙을 당하였음을 한편으로 당화처럼 보고 나타나게 원통하다 하였다.(벽위편 p. 274)
동부승지 정약용의 상소(정사 1797년 6월)에 관하여: 약용이 자수하고자 하였다면, 상소한 말이 순박하고 솔직하여 꾸밈이 없고 조각조각 적심을 나타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곧은 마음의 회개함을 볼 것이어늘, 이제 천언만어가 오로지 꾸며냄을 일삼으니 ( 그 상소가 극히 많았는데, 지금 이것은 기록을 덜어서 열 중 두셋에 불과하다). 그 스스로 이른바 회개한 곳은 ‘관리가 된 뒤, 어찌 이단의 설에 마음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불과할 따름이다. 자못 한 글자도 몹시 간절한 것이 없으므로, 약용이 비답을 받은 이튿날에 왕이 입시한 승지와 사관에게 묻기를: ‘정약용의 상소가 어떠하냐? 각각 소견을 말하라’ 하시니, 검열 오태증이 아뢰기를 ‘ 신의 소견으로는 이 사람이 아직도 그 사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 하니, 왕이 크게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 ‘네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었다.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이 학설이 대체 무엇이 좋아서 전후 30년간에 걸쳐 머리를 돌리고 마음을 고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슬프도다. ( 벽위편, 219)
벽위편 발문에 보면 원편자는 천주교 배척의 선봉장이었던 이 기경이라 하였고, 이만채는 그의 현손이라 한다. ... 이기경 편본은 1959년에 고 홍이섭 교수가 이기경의 후손이 산다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용진에서 한 사본을 발견하고, 이것을 양수본(兩水本)이라고 명명하였다(벽위편, 역자서문).
이렇게 벽위편에서 보듯이, 그토록 상소를 올리면서 정약용의 처형을 주장하던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을 옹호한 대표적인 선각자로만 둔갑시키려고 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나약한 심성으로 배교하였으나, 신앙인으로 회개하여 선종한 정요한은 사라지고, 자신들만을 옹호한 다산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2. 달레의 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1818) 2,3년 뒤라고 Daveluy, Notes, p. 340에서는 적고 있다), 정약용 요한은 이전보다도 더 열심히 모든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801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고, 그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 놓지 않았다. 그는 자주 오랫동안 묵상을 하였다. 정약용 요한은 그의 묵상의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외교인들의 미신을 반박하고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여러 가지 다른 서적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 여러 권이 박해 때에 땅 속에 감추어졌다가 벌레에 갉아 먹히고 썩고 하였으나, 많은 저서가 그의 집안에 보존되었다. 완전히 복권이 된 뒤에도 정요한은 생활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였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열심은 전에 그가 배교함으로 인하여 나쁜 모범을 보였던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감화시켰다. 정요한은 1835년 유방제 빠치피꼬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뒤(1833-1836년 거주), 그의 손으로 마지막 성사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 요한의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하여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그의 아들 홍 유산( 최석우 신부의 주석 : 비망기에도 홍 유산으로 나온다. \'홍\'을 \'정\'의 오식으로 보고 정 유산으로 해석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유산은 정약용의 장자 학연의 호였다.)은 재능과 학식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천주교가 자기 가족이 당한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며, 오랫동안 몹시 멀리하다가 마침내 회개하여 죽기 몇 해 전에 성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약용 요한의 누이 하나는, 1801년 박해에 대하여 말할 때에 이야기한 일이 있는 채제공 재상의 며느리였다. 이 여자는 16세에 과부가 되어 슬프고 외로운 일생을 외교인만 사는 시가에서 보냈다. 마침내 이 여자는 노경에 이르러 다행히도 신앙을 얻게 되었고, 1851년에는 본국인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몰래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그에게 모든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1987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 p.185- 186 ; Daveluy, Notes, p. 339-341).
정약용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모든 사실을 명쾌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터에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가문의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폐기하여 버렸거나, 달레의 기록처럼 숨겨서 보관하다가 벌레에 먹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기록들은 많은 부분이 회고록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희미한 기억으로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감추려고 하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은 다른 자료들로 보완이 되어야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3. 벽위편 말미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는 병자성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양의 천주교는 조사하여도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천주교는 처음에 입교하면 환약을 받아먹게 하는 것과, 세 차례 돈을 받는 일이 있으며, 조상의 신주를 쓸어 없애는 일이 있으며,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자는 일이 있고, 병들어 죽을 때에 본사(선교사)가 와서 눈알을 뽑아가는 일이 있었다. ,,,. 또한 입교한 사람이 병들어 죽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선교사에게 알려야 하며, 선교사가 오면 처자들은 모두 방문 밖에 꿇어앉게 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오래지 않아 병자가 죽으면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선교사는 흰 보자기로 시체의 머리를 싸매어 놓고 풀어보지 못하게 하며, 대개 눈알은 이미 없어졌더라.(벽위편, 373-374).
4.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다산 정약용의 병자성사를 부정하고 있
다.
<종부성사론의 반론>에서 :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거행하였다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는 주문모 신부 후임으로 1833년 말에 조선에 들어왔으나, 스캔들로 인하여 1836년 조선을 떠난 사람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1836년 결혼 60주년일인 2월 22일(양력4월 7일) 75세로 향리에서 운명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1836년 양력 4월 4일 이전에 서울을 떠나 산서성 고향집으로 출발하였다. 즉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이전에 서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 적어도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인 4월 4일 이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그가 어떻게 4월 7일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할 수 있겠는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 이런 그가 4월 7일 辰時初刻 (7시초)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주장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 김상홍, 다산학 연구, 1990 계명문화사, p.46-48)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병자성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부성사에 대한 이해가, 한문을 직역하여 알아들었거나, 위의 벽위편의 해국도지에 나오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병자성사는 반드시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서만 시행하는 성사가 아니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소결론 : 위의 사례들로 보아, 교회사는 교회의 신학을 아는 사람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을 배교자로 결론짓고 자신의 편으로 보는 측에서는, 모든 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생활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진 사람은 교회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일반 사학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내의 자료가 국외의 자료보다 우선한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릇된 추리를(Faction) 학설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있는 사실을(긍정) 기록한 자료를 추리로(가설) 번복할(부정)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빈치 코드라는 추리소설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신학을 배우지 않은 역사가가 교회사의 자료를 다룬다 해도, 그는 교회사가가 될 수 없다. 신학적인 지식 없이는 교회사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일반 역사가는 교회사를 연구할 때, 교회의 신적神的 요소를 제거하고 외적 현상만을 다룰 수 있으며, 자칫 그릇된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세 후기 교회의 <대사>의 오용과 남용에 따른 이른바 <면죄부>가 그러하다. (황치헌, 교회사는 신학인가?, 2004 한국 교회사 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p. 26 참조)
또한 교회 내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될 수 있는데, 문제에 대한 종합과 결정적인 판단은 교권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한국천주교회 창설과 주역 이벽, 2007 수원교구, 간행사 참조)
나. 천진암은 우리나라 천주교신앙의 태동 장소였다.
1. 다산은 천진암이 이벽과 정약전 등이 강학을 하던 장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녹암 권철신 묘지명, 1822년> 중에 천진암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고 말한다. : 선형 정약전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적에 이벽이 눈 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놓고 경을 담론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여유당전서 2, 1985 여강출판사 , p. 613 = 講學于天眞菴走魚寺)
<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 > 에서는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고 한다. :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임시로 머물면서 강습하였는데, 그 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제잠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하고 각공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여유당전서 2, 1985 여강 출판사, p.621=寓居走魚寺講學)
정약용이 정사년(1797)에 천진암에 와서 지은 시에서는 :
단오날에 둘째 형님(정약전)과 천진암에 와보니, 이벽의 독서처가 아직도 그저 있구나. (여유당 전집 1권, 1985 여강출판사, 199면 참조 = 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 천진소요집, 1827년>에서는 :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적에 오르내래며 놀던 길인데/
이제 지금 천진암에 다시 와보는 이 나그네의 마음은 서글퍼지네/
여기서 우리는 <붉은 잎>을 제목으로 시를 짓기도 하였었지/
여기서 호걸들과 선비들은 일찍이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였으며/
상서(중용,대학,서전,주역)를 외우고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폐허가 된 기숙사는 잡풀만 수북이 자랐구나/
참선하며 강학하던 학원(소림)은 아주 폐쇄되었구나/
새벽에 일어나 덕목을 외우기는 지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해가 지면 그런 책들만은 꺼내서 읽어본다오/
누각 앞 도랑건너 우리가 공부하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 터인데/
그 때 이 도장 선방에서 면학 수도하던 옛 친구들은 다 죽었으니/
이 세상 어디를 간들 그 벗들 다시는 찾아서 구해올 수가 없네그려/
아, 여기서 다시 면학 강학하며 그 옛날처럼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도다/
오늘밤은 잘데 없어 걱정했는데/
불교신도회장(이포)이 우리를 받아준다니, 믿고 자야지/
설마 관가에 고발 같은 무슨 일이야 하랴? (당시 1827년 정해년 박해중)
(여유당 전서 1, 1985 여강 출판사, p. 510)
이렇게 귀양에서 풀려난(1818) 후, 1827년에 65세로 천진암을 다시 찾은 다산은,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춘 이벽께서 강학하시고 독서하시던 천진암의 강학당, 독서처, 기숙사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
이상의 글을 살펴볼 때 한문의 번역 문제를 가지고 논할 필요도 없이, 강학은 천진암에서 있었음이 확실하다. 주어사와 함께 양쪽 모두에서 있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아 있는 곳은 천진암임을 알 수 있다.
2. 천진암 강학의 성격은 무엇이었나?
유학적인 공부,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공부와 실천으로 이어졌음을 다음의 글에서 알 수가 있다. :
위의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에서 본 바와 같이 숙야잠, 경재잠, 사물잠, 서명 등을 외우면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바르게 마음가짐을 하였다. 이는 유학적인 탐구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발전되어 신앙적인 명상으로 발전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렇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위의 벽위편에서 본 바와 같이 사방에서 적대자들이 그를 천주교 신자로 옭아 넣을 빌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민구, 한국천주교의 기원, 2002 국학 자료원, p. 220 참조).
< 달레, 교회사 상권> 에서는 이 강학의 성격을 신앙적인 모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 여리나 되었다. ... 연구회는 10여일 걸렸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 점 한 점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서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 그런데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의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 이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 이런 연구회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매우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내용이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레 상, 300- 303; 여유당전서 1, 1985 여강 출판사, 시문집 p.12 贈李檗 詩 참조)
이 강학의 성격은, 유학과 서양의 과학 탐구에 그치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주일을 지키는 등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였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신앙활동이 이미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학술, 이벽전> 에서는 :
이벽이 시세 무술년(1778) 이십오세라.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현우현사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더라. --- 일도 광주 원앙산사에 은거하심에 도우가 중도하니 성교요지를 하필하시더라. (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2002 국학 자료원, 286 참조)
광주에 있는 원앙산사는 천진암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씨네와 정씨네가 모여서 면학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성교요지를 하필하였다 함은 강학을 하면서 聖敎要旨, 즉 신앙내용을 가르쳤다는 뜻이다.
소결론 :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청에서는 기적심사를 관면하였다. 후손들의 활기찬 신앙생활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기적의 표가 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도 다산 정약용 요한의 후손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그 후손 중에는 여러 명의 성직자들도 있다. 모두가 정씨 가문과 다산 정요한의 신앙의 결실인 셈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여 진다고 한다. 정약용이 죽음에 앞서 후손들에게 무엇을 유언하였겠는가? 그토록 가문의 몰락 때문에 천주교를 반대하던 큰 아들 정학연이, 할 수없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역사의 원칙에 따라서 결론을 내려 보자.
1. 긍정적인 사실을 근거도 없이 부정할 수는 없다. 추리 소설로 자료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공식적인 기록이 개인적인 기록에 우선한다. ( 관변서류와 공문이 보다
더 객관적이다)
3. 가까운 자료가 우선한다. - 시기적으로 가까운 일기가, 자신을 미화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기억이 희미한 회고록보다 우선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내의 자료가 국외의 자료에 우선한다.
그러나 교회사에서는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신학자의 자료와 해석이 우선한다. 서양 선교사들의 자료라 하더라도, 한학에 능통한 수재들이 조선에 와서 20여년씩 천주교와 유교가 조선에서 만나는 과정을 연구하고, 조선 국내에 머물면서 기록한 성직자의 자료는 국내자료이다. 지금도 우리 중에는 그만큼 장기간 연구한 사람들이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므로, 양쪽 사정을 깊이 연구한 연구가의 기록이 더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교회사학은 신학으로서 사목과 결부되므로, 여러 가지 학설이 난무할
때에는 교권이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리하고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예, 교황 비오 9세의 실라부스)
이상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그릇된 편견으로 역사적인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사방의 적대자들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확실하게 드러내놓고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다산 정약용은 글자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게, 글자 속에 자신의 신앙을 감추어 놓았다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는, 수원 화성(1796년 완공)의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도 다산 정약용의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인 신부가 입국하여 새롭게 신앙생활이 활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정약용이 무언의 신앙표시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건축물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에 관하여 확실한 반대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화성의 건축물은 모두 다산 정약용의 책임 하에 완성된 작품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호교론적으로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감성에 의존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성직자들은(특히 천진암이 있는 수원교구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바로 알고, 천주교의 뿌리를 확실히 연구하면서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으며, 올바르게 알려야 할 것이다. < 김 학렬 요한 A.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