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제주교구 서귀복자성당에는 아주 반가운 얼굴이 찾아와 신자들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는 제주교구 주교좌본당인 제주중앙성당 다음으로 110여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서귀포본당(주임신부 고남일)의 전신인 구 ‘홍로본당’(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피정센타인 ‘면형의 집’)의 초대교회 신자였으며, 현재 경남 거제도본당에서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서귀포시 서홍동 출신으로 올해 90살의 임상순(베드로) 옹께서 실로 오랜만에 임 옹의 고향마을 인근인 서귀포시 동홍동의 서귀복자성당(주임신부 현성훈)을 찾아와 주일미사를 드리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고 신자들에게 벅찬 흥분과 감격스런 기쁨을 안겨드렸기 때문이다.
서귀포성당의 전신인 홍로본당은 제주교구의 뼈아픈 역사로 ‘신축교안’을 겪고 난 뒤인 1902년 ‘한논본당’에서 제3대 신부로 부임한 프랑스 출신 타케(엄택기 에밀리오)사제가 서귀포 홍로로 성당을 옮기면서 ‘홍로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한 뒤에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게 된 역사적인 곳이다.
이후 현재의 서귀포본당으로 자리를 이전한 후부터 오늘날까지 제주교구 남부지역의 모든 성당은 서귀포본당의 모태에서 태어난 본당들이다.
엄타케 신부는 식물학자로 왕벚나무등의 제주식물을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하였고, 제주도에 감귤나무가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도 주선하였으며, 홍로본당에서 약 15년간 부임하시다가 전남 목포 산정동 성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홍로본당은 본당신부가 없어 산정동 본당으로 전임한 엄타케 신부님이 1916년부터 1922년 까지 두 본당을 겸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오랜 역사를 가진 성당에서 임 옹은 1919년, 4년간의 보통학교를 다니던 12세의 어린나이에 바로 그 엄타케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임 옹은 서귀복자성당에서의 주일교중미사가 끝나자마자 과거의 기나긴 시간여행으로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는 세례를 받자마자 성당에서 늘 단골로 복사를 서다가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나서 이어 ‘동경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그 후 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한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뜻밖에도 일본 동경의 ‘샹봉’대주교가 있는 ‘새깨꾸주교좌’관구의 신학교에서 자신의 같은 고향 서홍동출신인 두 형제가 신학교로 들어오게 된 것을 알게 되어 너무도 기뻐했는데, 그들은 형 박평옥(요한)과 둘째인 박평도(요왕)인데 형은 신학교에서 안타깝게도 지병을 앓아 돌아가셨으며 동생은 사제서품을 받았다고 했다.
그 뒤에 임 옹은 고국으로 돌아와 대구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홍로본당의 제7대 주임인 최덕홍(요한)신부를 만나 ‘대구매일신문사’에서 기자활동을 계속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최 신부는 나중에 1949년, 제6대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하셨다고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이처럼 서귀포의 초대교회 신자인 임 옹께서 과거를 돌아보는 순간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쳐났으며 바로 엇 그제 인 것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하면서도 벅찬 기쁨을 얻는 듯 했다.
한편 서귀복자성당 역시 서귀포본당이 모태이며 약 4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초창기에는 ‘서귀중앙성당’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각 교구별로 한 본당은 ‘복자성당’으로 지정하게 되어 서귀복자성당으로 바뀌게 된 본당이다.
임 옹은 “그 시절의 성탄절은 너무도 아름답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였다.”고 과거를 떠올리며 이어 “고향을 방문하여 고향에서 미사를 드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니 너무도 기쁘고 행복하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말을 마친 뒤 또 다른 이웃들과의 만남을 위하여 환하게 웃으며 성당을 빠져나갔다.
참고 : 1. 서귀포성당 홈페이지 자료 참조.
2008년 4월 10일
평화신문 명예기자 강 기 붕 (요한보스코) bosco5004@naver.com